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야 문명 (문단 편집) === 유적 발굴과 재조명 === 마야 유적들은 스페인인들이 도착하기 이전에도 이미 대부분이 정글 속에 파묻혀버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소규모 도시 몇몇 개가 버티고 있었고 일부 부족들이 옛 폐허에 빌붙어서 살아가다시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모든 마야 유적들을 [[우상숭배]]의 잔재로 보고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마야 문명에 대해 학술적으로 재조명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마야 문명을 이해하려 시도한 유럽인은 '디에고 데 란다(Diego de Landa)'[* 1541년 [[스페인]]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나 1549년 [[유카탄]]에 도착했다. 이후 활발한 선교 활동으로 인해 사후 주교에 봉헌된다.]였다. [[프란치스코회]]의 선교사였던 란다는 '기독교를 포교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야인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마야어]]와 마야인들의 문화, 종교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란다가 마야 문화에 대해 남긴 기록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오늘날 우리가 마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의 99%는 란다가 말했거나 우리를 위해 남겨놓은 것들'이라는 말까지도 있다. 하지만 란다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는 않다. 란다는 기본적으로 마야 문명이 야만적이고 퇴치해야 할 대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기에 무려 '''5,000여 점'''의 마야 유물과 몇 십여권에 달하는 책들을 불태워버렸고, 수많은 마야 귀족들과 마야인들을 과도할 정도로 투옥하고 심문했다. 오죽했으면 스페인 본국에서도 원주민들에 대한 심문이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냐고 항의했을 정도.[* 스페인 왕실 측에서는 '기독교를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원주민들에게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유치한 수준'이라며 원주민들을 종교 재판에서 면제해주려 시도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란다가 원주민들에게 종교 재판을 진행할 때 필수적이었던 절차 대부분을 생략하고 임의로 처리해버리면서 란다에 대한 본국의 불만은 더더욱 심해졌다. 결국 란다는 지나친 종교 재판으로 고발당해 스페인 본국으로 송환당했고, 결국 1571년 멕시코에서 숨을 거뒀다.] 이때 란다가 지나치게 많은 유물과 기록들을 불태워버린 바람에 오히려 후대인들의 마야 문명에 대한 연구가 더 어려워졌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위의 내용만 보고 란다를 무지한 인물이라고만 내려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당시 마야 문명은 [[인신공양]]과 지나치게 잔인한 예식 문화를 동반하는 문명이었는데, 유럽인들의 관점에서 이는 경악스럽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란다는 마야 문명권에서 인신공양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아 곳곳을 직접 돌아다니며 이를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쿠풀레스를 통과하는 도중 300명 정도의 마을에서 어린 소년을 산 제물로 바치려는 꼴을 보고 격노해 군중 속으로 돌진해 소년을 풀어주고 설교를 하기도 했다. 란다는 진심으로 원주민들이 개종해 신의 곁에서 구원받기를 바랐고 이를 위해 원주민들과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원주민=정복해야할 열등한 대상'이라고 여겼던 당시 스페인인치고 이는 놀라운 행동이었다. 일부 부족들은 란다와 친해지자 부족 대대로 내려오는 사슴가죽 책을 란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문제는 란다가 원주민들과 친해지려 시도한 동기 자체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한 다음 최대한 빨리 없애버리는 것'이긴 했지만...] 하지만 란다는 편집증적일 정도로 '본인이 보기에 안좋은' 마야 문화를 없애는 데에 집착했고,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심할 정도로 학대하고 밀어붙였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란다는 마야인들의 손목을 줄로 묶어 매달은 다음, 발에 무거운 추나 돌을 매다는 식으로 고문했다. 이 과정에서 지나친 고문을 이기지 못한 마야인들이 죽었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란다는 이를 부인했다.] 즉 란다는 한 쪽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복잡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페인 본국에서도 독특한 마야 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물론 학술적인 목적은 절대 아니었고 유물 수집같은 고상한 취미를 가진 이들의 관심일 뿐이었긴 했다. 당시 스페인 국왕이던 [[펠리페 2세]]는 '디에고 가르시아 데 팔라시오'에게 자신의 영토에 대해 자세한 조사를 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1576년 [[과테말라]] 지방을 탐험한 디에고 가르시아는 [[코판]] 유적을 발견한 뒤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스페인으로 보냈다. 이 보고서에서는 '손으로 만든 놀라운 건물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 앞에는 돌에 거대한 독수리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그에 적혀진 문자는 해독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등 당시 유적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마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유적에 대한 약탈로 이어지기도 했다. 샤를 3세가 파견한 안토니오 델 리오 대위는 1786년 5월 [[팔렝케]] 유적에 도착해 건물들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왕의 취향에 맞을 법한 유물들을 싸그리 털어갔다. 잘 보존되어 있던 옥좌를 절단해 떼어가는가 하면 곳곳의 석회부조도 통째로 스페인으로 실어보내면서 유적 곳곳에는 흉물스런 구멍들이 뚫렸다.[* 현재 이 유물들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왕립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1500년대 이후 마야 문명에 대한 관심을 그저 이색적인 취향 정도에 그쳤으며 약 300년 간 제대로 연구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던 중 등장한 인물이 '장 프레데릭 발덱(Jean Frédéric Waldeck)'이었다. 발덱은 [[프랑스]]의 골동품 수집가이자 지도 제작자, 예술가, 탐험가였다. 1825년 [[영국]]의 한 광산 회사에 고용되어 남미로 떠났지만 얼마 못가 잘렸고, 해고된 이후에는 메소아메리카 지방의 유적들에 매료되어 폐허 속에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발덱은 1800년대 중후반에 걸쳐 [[욱스말]], [[팔렝케]] 등 수많은 유적들을 그려 책을 출판했는데, 정글 속 아름다운 폐허의 모습이 한창 [[낭만주의]] 바람이 불던 유럽의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다만 발덱의 그림은 은연 중에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그리스]]와 [[고대 로마|로마]] 풍이 섞여있었고[* [[팔렝케]]의 비문의 사원에 존재하지도 않는 코끼리 머리를 그려넣는가 하면 욱스말의 피라미드를 대놓고 이집트풍으로 묘사했다. 유럽인들은 이 그림만 보고 마야 문명과 구대륙 간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아틀란티스]]의 전설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이때문에 마야 문명이 옛 그리스-로마 문명에서 갈라져 나온 아류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베일에 싸여있던 마야 문명의 모습을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만큼은 분명 업적이라 할 만하다.[* 발덱은 방대한 [[포르노]] 작품을 출판한 걸로도 악명이 높았는데,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걸맞은 죽음을 맞았다. 까페에서 아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중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자 그녀를 보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대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57kk1dXoAMCl5x.jpg|width=37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therwood-chichen.jpg|width=367]]}}}||{{{#!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therwood_stela_d.jpg|width=16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late21lasmonjaschichenitza.jpg|width=328]]}}}|| |||||||| 스티븐스와 캐서우드의 삽화. 흔히 '마야 문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이들의 삽화에서 기원했을 정도로 유럽인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발덱의 뒤를 이어 마야 문명의 신비로움을 유럽 세계에 소개한 또다른 인물 중 '존 로이드 스티븐스'와 '프레데릭 캐서우드'가 있다. 둘은 1839년 남미의 유적들을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유카탄 일대로 건너왔고, 이후 1840년대 초반에 걸쳐서 수많은 마야 유적들을 탐험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스티븐스와 캐서우드는 의기투합해 3년 동안 열심히 정글 속을 헤멨다. [[온두라스]]의 [[코판]] 유적에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그려냈으며, 이후 퀴리구아, [[팔렝케]], [[욱스말]] 등을 방문해 아름다운 스케치를 그렸다. 모험을 끝낸 뒤 [[뉴욕]]으로 돌아온 스티븐스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출판해 대박을 쳤고, 이후에 캐서우드와 한번 더 남미 여행을 떠나 또다른 유적 스케치들을 남겼다. 이 스케치들을 또 2권의 책으로 나누어 출판했는데 이 역시 대박을 쳤다. 스티븐스와 캐서우드는 발덱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마야인들이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설을 부정했고, 이는 마야 문명권과 구세계 간의 연관성에만 주목하던 마야학의 흐름을 바꾸는 이정표가 된다.[* 스티븐스는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1852년 뉴욕에서 죽었다. 반면 캐서우드는 1854년 타고가던 배가 난파되며 130여 명의 승객과 함께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다.] >아침이 되어도 숲을 뒤덮고 있던 구름은 걷힐 줄 몰랐다. 태양이 떠오를 쯤이 되어서야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일꾼도 하나둘씩 나타났다. 9시가 되자 우리는 막사를 떠났다. 나뭇가지들은 축축히 젖어 있었으며 땅은 질퍽한 진창투성이였다. 우리의 행진은 힘겨웠다. 주요한 유적들이 밀집되어 있는 구역을 다시 한번 지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방대한 작업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즉각 완벽한 탐사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우리의 안내자는 이 구역밖에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을에서 1리그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기둥을 본 적이 있으므로 다른 방향으로도 유적들이 분산되어 있을 거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잇었다. 숲 속에 완전히 파묻혀서 이제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미지의 유적들이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숲은 너무도 빽빽해서 그곳을 통과하리라는 꿈을 애당초 꾸지 않는 게 좋을 듯 싶었다. 정말로 세심하게 탐사를 하고 싶다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나무를 모두 베어 태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무작정 그 일에 매달릴 수도 없거니와 그 일은 건기에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 >(중략) > >격렬한 토론을 거친 후에 우리는 '우상들' 중 하나를 선택했으며, 주위의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이 일 또한 쉽지 않았다. 우리는 도끼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인디오들이 갖고 있는 도구라고는 농경용 큰 칼이나 커다란 외날 단검이 전부였다. 그 도구들은 지방에 따라 모양도 가지각색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갈아서 만든 물건인지라 나뭇가지나 관목을 치기에나 적당하지 큰 나무를 베기에는 무리였다. 인디오들은 열성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으나 이내 피곤하다며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겨주고는 앉아서 쉬곤 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옆에서 지켜보는 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칼을 들고 일을 하는 인디오들을 바라보면서 초조감을 억누를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쉽게 일을 해나갔다. 마침내 우리의 장애물이 없어지자 우상 주변이 환해졌다. 캐서우드는 그 곳에 작업대를 설치한 뒤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 >이 유적에 대해 내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차마 형언할 수 없으리라. 이곳은 전혀 오염이 되지 않은 곳이다. 보물을 숨기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안내자도 없는 순결한 땅인 것이다. 우리는 약 9m 앞도 보지 못하고 우리의 발밑에 무엇이 잠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면을 뒤덮고 있던 나뭇가지와 넝쿨을 걷어 내자 조각의 한귀퉁이가 지면 위로 삐쭉 솟아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인디오들이 일을 하는 동안 초조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들여다보았다. 눈 하나, 귀 하나, 손, 그리고 다리 하나가 보였다. 그 순간 그들의 칼과 무엇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인디오들을 밀어 제치고 손으로 땅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미를 한껏 발산하고 있는 신비스러운 조각품 - 재잘거리는 앵무새들과 바스락거리는 원숭이만이 장중한 침묵을 깨뜨리고 있었다. - 이 도시에 맴돌고 있는 비애와 신비.... 이 모든 것이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흥분감을 느끼게 했다. > >- 스티븐스의 [[티칼]] 탐험 회고록. 19세기 중반 들어 [[사진기]]라는 발명품이 등장하면서 마야학의 판도가 뒤바뀐다. 예전에는 그림에만 의존해야 했다면 이제는 사진기로 정확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사진술은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이라,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 정글 속을 헤쳐나가야 했으며 습기 많은 열대 지방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것도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이 모든 역경을 뚫고 마야 유적들을 찍고자 한 이가 바로 '데지레 샤르나이'였다. 샤르나이는 밀타, 팔렝케, 이사말, 욱스말, 치첸 이트사 등 유적들을 사진에 고스란히 담아냈고, 장비 이상으로 사진을 찍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아예 신문지를 활용해 유적들을 통째로 주형을 떠가기까지 했다. 이때 샤르나이와 함께 동행했던 젊은 영국인 탐험가 '알프레드 모슬레이'는 샤르나이로부터 전수받은 사진술과 주형술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실물을 완벽히 재현했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여담이지만 샤르나이와 모슬레이의 사이는 딱히 좋지만은 않았다. 열정적이고 허풍이 심한 프랑스 출신 샤르나이와,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영국 출신 모슬레이의 상성이 서로 극과 극이었던 것이다. 모슬레이는 자신의 일기장에 샤르나이에 대한 욕을 적기까지 했다. 하지만 둘은 겉으로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샤르나이는 모슬레이에게 전해줄 수 있는 대부분을 전수해주었다.] 1900년대에는 마야학의 판도를 완전히 뒤짚어엎은 2개의 발견이 일어났다. 첫째는 '''[[보남팍]]의 벽화 발견'''이었다. 사진작가 질르 힐리는 평소 원주민인 라칸돈족에게 구호품, 식량, 약품 등을 가져다주며 우호를 쌓은 인물이었는데, 라칸돈족은 그 보답으로 힐리에게 여러 유적들을 소개시켜주곤 했다. 1946년 5월의 어느 날에는 한 라칸돈족 친구가 이전보다 훨씬 거대한 유적으로 안내해주었는데, 이 유적의 내부에는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벽화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눈을 의심할만큼 생생히 보존된 벽화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의 소실되었다고 알려졌던 마야의 회화가 뜻하지 않게 완벽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보남팍 벽화는 다른 쪽으로도 의의가 깊다. 바로 '''마야 문명의 잔혹성을 가감없이 드러낸 사건'''이라는 것이다. 보남팍 벽화가 발견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마야 문명을 '별을 관측하는 신관들이 지배하는 평화로운 문명'이라는 신비주의적 환상에 빠져 있었다. 허나 보남팍 벽화에서 목이 잘리고 손톱이 뽑힌 포로들의 모습,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마야인들의 모습이 등장하며 마야 문명이 평화로웠다는 기존의 학설을 정면으로 부정해버리고 기존의 환상을 와장창 깨뜨려버리게 된다.[* 오죽 충격이 컸으면 일부 마야학자들은 보남팍 벽화가 위조된 게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했다. 기존 마야학자들이 품고 있던 환상주의적이고 평화로운 마야 문명의 이미지와는 지나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발견은 '''[[키니치 하나브 파칼]]의 무덤 발견'''이다. 1949년 멕시코 고고학자들은 루스의 주재 하에 팔렝케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비문의 신전 바닥 안쪽에 있던 2개의 홈을 발견한다. 신전 벽면이 바닥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아래쪽까지 내려가는 걸 수상히 여긴 루스는 신전에 깔린 석판을 들어내고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흙과 자갈을 걷어내자 계단과 아래로 내려가는 아치형 통로가 나왔고, 이를 지나자 또 복도와 석벽이 수 차례 등장하며 꾸불꾸불 지하로 내려갔다. 무려 3년 간의 작업 끝에 루스는 거대한 석회암 석실에 도달했다. 석실 안에는 거대한 석조 무덤이 자리해 있었으며 10명의 인물상이 그려진 석판을 6명의 인물상이 받치고 있었다. 기중기로 석관의 뚜껑을 들어내자 안에 병 모양의 틀이 있었고, 이 틀의 뚜껑마자 치우자 마침내 파칼 왕의 유해와 [[비취]]로 깎은 [[데스마스크]]가 보였다. 유해는 온통 비취 부장품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왕관, 펜덴트, 목걸이, 가슴가리개, 팔찌, 반지 등 모든 것이 비취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발견으로 인해 '''마야의 피라미드 역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이집트|피라미드]]처럼 왕의 무덤으로 쓰였다'''는 게 증명된다. 예전에는 마야 피라미드들이 달력과 제례를 위한 일종의 기념물이라고만 생각했다면, 이 발견으로 인해 마야 역시 왕의 묘를 목적으로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무덤을 발견한 루스 역시 이 발견이 예외적이라고 생각했다. 팔렝케의 파칼 왕의 무덤이 예외적인 사례고 마야 피라미드들은 일반적으로 무덤으로 쓰일 목적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훗날 [[티칼]]을 포함해 다른 유적의 피라미드들에서도 수차례 유해 발굴이 일어나며 결국 '마야의 피라미드 = 왕의 무덤'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마야에서 썼던 문자는 건물과 조각을 비롯하여 곳곳에 남아 있어 해독되고 있다. 문자 자체는 기본적으로 완전히 규명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수십 개의 도시 연합에 가까웠던 마야의 특성상, 언어 또한 수십 개에 달해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니다. 수십 개의 도시 연합 중에 통치자의 이름이 남아있는 국가는 '''코판'''(Copán), '''칼라크물'''(Calakmul), '''믹스코 비에호'''(Mixco Viejo), '''모툴 데 산 호세'''(Motul de San José), '''팔렝케'''(Palenque), '''키리과'''(Quiriguá), '''세이발'''(Seibal), '''티칼'''(Tikal) 등이다. 2018년 2월, 과테말라 정글속에서 LIDAR 기술을 이용해 무려 60,000개 이상의 건축물이 있는 상주 인구 200,000명 규모의 거대 유적 도시가 발견됨에 따라 그동안 학자들이 믿고 있었던 마야 문명의 모든 기본적인 규모나 역사에 변화를 줄 것으로 예고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